제 6 호 설악 오색 케이블카 착공 즈음에
정기자 임지혁 jihyuki@outlook.com
아마도 모든 것이 태초부터 균형을 이룰 수는 없는 것인가 생각한다.
가령 어릴 적의 사회과부도를 머리 속에 떠올려보면 수자원이 풍부한 남해 지방과 논밭이 펼쳐진 호남지방, 교통이 편리한 대전이나 대구 등 지역마다의 특징이나 강점에 대한 내용들이 기억나고는 한다. 그런데 수업의 내용에 그다지 집중하지 않는 불량 학생이었다면 그보다도 다른 내용에 관심을 가져보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수자원도 없고 논밭도 발달하기 어려우면서 교통도 불편한 불우한 지방. 영동이라는 지방도 그런 곳들 가운데 한 곳이다.[1]
아마 그곳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은 얼마 없지 싶다. 당연한 일이다. 그쪽에는 사람이 잘 살지 않는다. 태백산맥을 넘어 서쪽에서 오기에도 불편하고 남쪽에서도 오기에 불편하니 사람들이 모일 일이 없는 동네이다. 그나마 북쪽의 원산에서 오가기에는 편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그쪽은 이미 오래 전에 막힌 길이다. 수자원이라 해봐야 오징어와 황태, 그런 소규모 건어물 위주로만 발달하였고 태백산맥 동쪽으로 몇 km 남짓한 평야에서는 제대로 농사를 짓기가 어렵다. 먼 옛날에는 낙랑, 동예, 옥저. 이런 곳들의 세력권이었다고는 하지만 변변한 유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당연한 일이다. 그쪽 동해안에는 사람이 잘 살지 않는 데다 먹고 살 거리도 별로 없다. 이번의 이야기는 근세 그곳의 사람들의 생존에 대한 내용이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 사람들이 택한 첫 장소는 설악산이었다. 이 글의 독자들 가운데 설악산이라고 한다면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모르겠다. 산 이름이야 들어본 사람이 많겠지만 세부적으로는 기껏해야 동화로도 출간된 오세암 설화 정도나 알지 않을까 싶다. 대청봉이나 신흥사, 백담사, 낙산사. 그런 이야기들은 나이대가 조금 올라가야만 대화가 통하고는 한다.
설악은 원래 금강산 옆에 있는 산 정도로 여겨졌다. 금강산과의 거리도 멀지 않아서 금강산이 이미 전근대에 국내외로 유명했던 것과는 달리 인지도가 다소 떨어지는 말 그대로 부속된 산 정도로, 그나마 절경이던 울산바위 정도가 유명하다는 정도로 인식되던 곳이었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소외되던 설악산의 진가를 발견한 것은 바로 일제강점기의 일제 당국이었다. 당시 금강산선 철도 개통 등 금강산 관광 개발을 성공적으로 끝마친 일본은 그 부근에 있던 설악산의 가치에 주목했다. 여기에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같이 심미적인 요소들도 있지 않았을까 싶지만 실질적으로는 동해선 철도 건설에 발맞춘 착취의 일종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1945년의 광복으로 설악산 관광이나 동해선 완전 개통은 미수에 그치고, 해방 후 경제난과 전란으로 설악산 일대의 개발은 지지부진했다. 특히 전란 때 설악산은 격전지 중 하나였다.
그러던 설악산의 운명을 뒤바꾼 것이 군사정권이다. 비민주적으로 집권한 그들에게는 권력에 대한 당위성이 필요했으므로 경제 발전은 그 목적에 정확히 부합하는 성과이자 근거였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경제적 상황은 인구가 많은 호남 지역에 대해서도 홀대론이 나오는 마당에, 인구도 적고 산업이 발달하기도 어려운 영동 지역에 투자하기에는 여의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대외적으로는 ‘설악산이 한국의 요세미티’라니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질적으로 설악산 관광 지구의 개발은 최소한의 비용으로 영동지방에 내세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발전에 대한 증표였다. 실제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휴가 때 설악산 비선대 등지에 종종 방문했다. 1978년 11월의 생전 마지막 생일도 설악산 관광호텔에서 맞이했다.
설악산은 점차 관광 단지로서 개발되었다. 1970년에는 그곳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고, 1971년에는 지금도 명소로 남아있는 케이블카가 (박정희의 사위인) 고 한병기 씨가 사업권을 흭득해 운영을 시작한다. 이 즈음 설악산의 입구나 다름없던 이른바 ‘설악동 170번지’는 도회지와 다를 바 없는 엄청난 호황을 누리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여기서 이야기하는 호황은 그곳 사람들의 일터가 되어주었던 명부(明部)와, 상인이나 숙박업소의 폭리나 유흥업소의 대두와 같은 암부(暗部)를 모두 포함한다는 것에 유의해야만 한다.
그 후로 설악동은 두어 번의 변천을 겪는다. 처음은 1978~1979년 즈음에 설악동종합개발사업이라는 이름으로 170번지에 살던 사람들이 공원에서 더 떨어진 곳으로 더 바깥쪽으로 쫓겨난 것, 그리고 그 즈음에 박정희 정권이 끝을 고하는 변화이다. 하지만 관성이라고 할지 설악동이 그 직후에 몰락한 것은 아니다. 이 변화로 비록 접근성이 떨어지는 데다 관광 개발 사업의 절대적인 후원자가 사라졌지만 90년대까지도 그곳은 상업적으로 성황이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지만 그 후의 점진적인 변화로서, 적어도 1999년생인 필자가 살던 어릴 적의 설악동은 이미 폐허가 되었다. 이렇게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몰락, 이것이 두 번째 변천이다.
만약 지금 설악동과 소공원에 간다면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공원으로 가는 길에 있는 숙박업소들은 완전히 몰락했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폐허가 되었다. 반면 공원에 도착해서 단풍 속 풍경에 녹아든 켄싱턴 호텔에 다다르고, 권금성으로 가는 케이블카를 타게 되면 그 일대는 깨끗하게 리모델링되어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케이블카는 여전히 만원인 채로 권금성을 오가고 있다지만,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제외하면 영동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즉 설악산의 이야기는 명백히 해피엔딩이 아니다. 설악산은 그 때 그 곳의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도와주었지만 지속적으로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지는 않았다.
대신이라고 할지, 그 후로 영동지방의 중심지는 바닷가 쪽으로 옮겨갔다. 주된 산업은 여전히 관광업이지만 이제는 그 배경이 설악산이 아닌 동해 바다가 된 것이다. 그 일대의 대표적인 시장이던 속초중앙시장이 언젠가 그 정식 명칭을 관광수산시장으로 바꾸었다는 점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서울 사람들도 많이 알고 있는 ‘만석닭강정’이라던지 하는 업체들도 모두 이 시기에 성장한 곳들이다.
이 시기에 들어서면 영동지방은 확실히 환경이 나아진다. 강릉공항과 속초공항이 양양국제공항으로 통합되며 항공 교통편이 불편해졌다고 하지만, 도로교통은 44번 국도와 미시령터널, 7번 국도가 점차 정비되면서 확연히 좋아졌다. 여기에 서울양양고속도로와 동해고속도로까지 개통하면서 어느새 영동 지방은 서울에서 두 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 곳이 되었다. 과거, 눈이 내리면 그야말로 목숨 걸고 고갯길을 넘어야만 했던 시절에 비하면 천지개벽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는 춘천속초선이나 동해북부선의 철도 노선도 개통될 예정이라고 하니 그곳의 미래는 마냥 장밋빛으로 보이기만 한다. 속된 말로 집값도 많이 올랐다.
하지만 필자는 지금의 영동에서 종종 어두운 과거를 바라보고는 한다. 예전처럼 관광산업으로 그곳은 부흥하고 있고, 한편으로 교통편도 좋아졌으니 과거 설악산의 호황처럼 그저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도대체 누가 고성 속초 양양에서 산다는 말인가? 그곳에는 번번한 대학교도 없고, 산업단지라고는 조그마한 농공단지 몇 곳이 있을 뿐이며 일자리라고는 아르바이트나 노인일자리사업 정도가 전부이다. 그저 관광지에다 노후의 은퇴지, 국가 차원에서의 5공화국과 6공화국 모든 정부의 영동에 대한 인식은, 그 오진 곳에까지 경제 성장을 일구었다고 자신만만할지는 모르겠지만 박정희 때의 그것에서 전혀 변하지 않은 셈이다. 그 때에는 나라가 가난했다는 핑계라도 있었다. 지금은 무어란 말인가. 사람들은 밥을 굶지는 않는다는 의미로서의 생존만을 인지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니 오색에 케이블카가 들어선다고 이곳이 부흥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런 지역균형발전, 뭐 그런 구색 좋은 이야기를 붙여서 사업이란 걸 한다지만 볼품없는 그곳의, 가진 것 없는 사람들에게는 먹고 살 정도의 떡고물이나 떨어질 뿐이다. 그딴 돈 꾸러미를 대준다고 해보아야 어디에 쓰겠는가. 이곳의 사람들은 이미 명부(冥府)의 샛길을 지나왔다. 지역균형이라는 목표는 이미 끝장났고, 그런 곳이 영동 뿐 아니라는 것이 우리의 불행이다. 아니, ‘서울 사람인 우리들’에게는 별 일 아니겠지만 말이다.
[1] 영동지방이라는 말은 태백산맥 동쪽의 동해안 지방을 의미하는 말로써 강릉이나 동해 일대까지도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영동 북부, 즉 고성, 속초, 양양에 대해서 다루기로 하겠다. 이는 영동의 남부 지방은 영동고속도로, 철도 노선 등으로 북부와는 맥락이 다소 다른 부류에 속하기 때문이다.
[참고자료]
큐레이터. (2023). 일제강점기 설악산 대청봉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루트파인더스. http://www.routefinder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79
최재도. (2011). <기억 속의 설악1번지> ‘그곳’에서 ‘그때’를 만나다(3). 설악신문. http://www.soraknews.co.kr/renewal/kims7/bbs.php?table=news&query=view&uid=22775
김홍준. (2022). 스러지는 설악동 … 가게 사장이 기자에게 물었다 “유령 나올 것 같죠?”. 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13161#home
최기영. (2015). [미공개 기록 강원도는 대통령들의 안식처였다]박 전 대통령의 생일 아침식사는 비선대 감자부침 한접시. 강원일보. https://kwnews.co.kr/page/view/2015010600000000167
이승용. (2016). 설악산 케이블카 논란 가열, '박정희 사위 한병기 특혜' 재조명. 비즈니스포스트. https://www.businesspost.co.kr/BP?command=article_view&num=33141
이미지 출처(표지)
박서보. (1977). 묘법 No. 18~76~77. 현대화랑. https://hyundaihwarang.com/?c=artist&s=1&gbn=slider&gp=1&ix=160